명성황후 #시대극 #이미연 #유동근 #문근영 #정하영
극작가 정하영씨는 신기하게도 홈페이지에 본인의 작품 대본을 모두 올리고 있다. 엄연히 저작권이 있는 창작물인데 아무 조건 없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은 이유가 있을까.
지난해 90년대 작품 <왕과 비>의 대본을 다 읽고 최근 2002년 작품 <명성황후> 대본을 거의 다 읽었다. 당시 어린 나이에 받았던 인상과 20년이 지난 지금 느끼는 게 매우 다르다.
이미연이 명성황후에 캐스팅된 것은 어릴 적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연은 내가 10대였던 시절에는 하이틴 스타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명한 배우라는 건 알지만 그렇게 예쁜지는 잘 몰랐다. 연기도 사실 사극에 능통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발성과 발음이 부족해 보여서 그리 잘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대본을 읽고 재확인까지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미영을 주인공으로 지명했는지 납득이 갔다.
정하영 작가의 다른 사극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대체로 매우 크고 카리스마가 강한 여장부 스타일이다. 거기에 <꽃들의 전쟁>의 김현주나 <장녹수>의 장녹수처럼 요염한 면모가 함께 있는지, 아니면 <왕과 비>의 채시라처럼 지적인 모습이 더 돋보이는지에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명성황후이라는 캐릭터는 다른 주인공보다 훨씬 약한 편이다. 물론 외유내강 성격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명성황후 하면 흔히 떠오르는 권력의 화신 같은 모습보다는 차분하고 연약하며 인내하고 슬퍼하는 면이 더 강조됐다. 대본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인데, 정하영 작가가 명성황후라는 실제 인물의 삶에 대해 상당한 연민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동정적이고 비련의 인물에 가까운 역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를 찾지 않았나.
이미영은 그런 면에서 매우 적합했다. 먼저 배우 본인이 워낙 아름답고 청순하기 때문에 드시면서 차갑다고 각인됐던 기존 명성황후 이미지를 씻어내기에 적합했다. 정하영의 대사는 본래도 굉장히 우아하지만 배우의 외모도 목소리도 품위 있고 우아함이 한층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사극 특유의 말투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지만 점점 그런 부분도 많이 자리 잡으면서 어색함이 없었다. 작가가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인물도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싶어하는 스타일임을 고려하면 이미연의 캐스팅은 최적이었던 것 같다. (우선 이분 정말 예쁘다. 왜 어릴때는 예쁜지 몰랐을까?)
아역을 맡은 문근영의 어린 모습도 오랜만에 봐서 기뻤다. 사극용으로 훈련된 발성이 아닌 어린 소녀의 가련한 목소리로 대사를 친다는 점이 굳이 결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앞서 말한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염두에 둔다면 그도 계산된 디렉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이분도 그냥 예쁘다. 제가 원래 문근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보다 훨씬 예뻐서 깜짝 놀랐다.
유동근의 발성은 정말 명불허전이다. 사극 연기를 잘하는 중년 배우들은 많고 왕역으로 유명한 배우들도 많지만 유동근의 그 목소리와 대사톤을 대하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낮아도 위엄 넘치고 또렷하면서도 풍성하게 울리는 음성은 도대체 어떻게 나올까. <용의 눈물>의 이환경 작가와 정하영 작가의 대사는 리듬이 다를 텐데 유동근은 본인만의 리듬으로 다 소화해 버리는 것 같다.
고종 역 이진우의 대사는 어려서부터 들으면 뭔지 모르는 약간의 불편함이랄까, 좀처럼 말할 수 없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 보면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글의 마지막에 호흡이 많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좀 느끼하다.;; 명령을 할 때나 소리를 지를 때는 역시 탄탄한 발성답게 너무 웅규가 좋고 멋있는데, 특히 인자하고 다정하게 말할 때만 그런 느낌이 든다. 배우의 생김새도 약간 부처님 얼굴처럼 둥글고 관대해보이는데 대사톤까지 너무 부드러워서 그런 것 같다. 배역도 우유부단하고 정이 많은 성격이니 그렇게 연기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대본만 보면 고종은 약하고 결단력이 없어 답답한 캐릭터지만 한번씩 강하게 나오는 부분에서는 이진우가 너무 단호하고 큰 소리로 위엄 넘치는 연기를 해서 좀 헷갈린다. 그런데 그렇게 호령하는 연기가 정말 너무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