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에 가면 안되는 이유[거지처세학3] 중년 남성들과 함께

얼마 전 경조사에서 만난 외할머니 6촌 여동생이 오빠 그거 알아? 형이 아주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 여동생과 나는 30년 이상 지나서 만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나는 그의 나이가 10대 초반이었을 때 본 스무 살이 되려는 나름 예쁜 꼬마였다.

그의 나이는 10대 초반에 본 큰아버지, 즉 나의 아버지는 거의 지금의 내 나이였다. 한국의, 아니 세상의 50대 남성 상당수가 어릴 때 ‘가장 닮고 싶지 않은 대상’으로 아버지를 둔 게 아닌가. 나도 그랬다. 일상을 공유하고 세밀한 인간적 결함과 세속적 비겁함이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사이이기 때문에 아들에게 아버지는 인생의 반면교사가 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에서 극적인 상징으로 나타나는 아버지 살해(Patricide)가 서구 문화의 저변에 존재하는 보편적 신화소임이 우연이 아니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내 어린 시절 친한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단 한 가지 존경하는 것이 있으면 아버지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스무 살 무렵 누군가의 방에 누워 두 개비의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내뱉은 말이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흔히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거나 ‘나는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다.’라는 대사를 볼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의 배제된 성에서 여성끼리 공감하는 담화의 대표선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 결국 대부분 엄마처럼 살게 된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아들은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은데 아빠처럼 살게 될까. 게다가 나는 이미 담배조차 끊어버렸는데….

아들이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외견을 닮았다는 사실은 ‘아버지 살해’라는 신화소가 말하면 ‘현실소’라 할 수 있다. 외모는 고사하고 내면까지는 어떤가. 안타깝게도 딸이 어머니의 전철을 밟듯 아들도 아버지가 되는 순간, 아니 솔직히 말해 그저 나이가 들기만 하면 아버지의 궤적을 똑같이 밟아가는 게 아닐까. 칼 포퍼는 “젊고 마르크스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지만 그 시대를 살아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으면 더 바보”라고 말했다. 악착같이 자기 나름대로 지혜롭게 사는 동안 바보 취급을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아들은 어느새 아버지가 되는 것 같다.

바보가 되지 않도록 하는 행위가 사실 더 바보가 되긴 하다. 알 듯 모를 듯한 바보같은 행동은 이른바 연륜으로 둔갑하고 하늘의 별에 둔 시선은 실족 공포에 발길을 돌리고 가슴에 혹시 얕게 묻혀 있었을지도 모르는 도덕률은 허영심으로 둔갑해 어느새 현실만이 삶의 준거로 작동하며 내가 보는 거울 속에서는 아버지가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 동시에 아버지를 불쾌하게 여긴 어린 시절의 나, ‘아버지가 그랬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지금의 나, 그 속에서 후자인 내가 더 자연스러워졌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 꼭 기쁜 일은 아니다. 그런 이해의 확장이 삶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졌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삶에 대한 이해의 지평은 머리카락이 줄어들도록 위축돼 있다.

대학 시절 누구보다 격렬한 운동권 투사였던 동아리 친구들은 그때 우리가 증오해 마지 않았던 독재자들에 대해 지난 송년회에서 용서와 관대함을 역설한다. 그 친구의 행동에 대다수가 혀를 찼지만 그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곧이어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말로 그 문제를 정리하고 늘어진 뱃살과 누구나 위로 올라가는 이마선부터 은퇴 후 이야기, 자녀의 대학 진학과 취업 이야기, 누군가 바람피운 이야기까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박장대소한다. 이어지는 노래방에서는 과거 교정에서 스크럼을 차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깨동무가 연출되고 누군가 이문세나 김광석을 부르는 가운데 중년 남성끼리 연인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번갈아 포옹을 나눈다.

변화란 어떤 의미에서 동화이고 이해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타협이라는 생각도 든다. 유행가 가사의 성숙이 아니라 남루에 가까운 타협. 가능하면 중년 남성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지 않는 이유는 말하자면 어렸을 때 아버지와 무언가를 함께 하고 싶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안치영 /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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