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7월 26일 오후 2시 20분.김포국제공항에서 110명의 승객과 6명의 승무원을 태운 아시아나항공 733편이 목포공항으로 출발합니다.예상대로라면 1시간도 걸리지 않는 오후 3시 15분 목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하지만 이 비행기는 목포 공항에 도착하지 못했어요.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1993년 7월 26일.

1993년 7월 26일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전남 영암군 목포공항에 도착 예정이었던 아시아나항공의 OZ733편 B737-5L9 여객기는 목포공항에 착륙하지 못했습니다.당시 목포공항에는 강한 비가 내렸고 오후 3시 24분. 733기는 첫 착륙에 실패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최근에도 자주 발생하는 착륙 복행이므로 오늘은 좀 힘들다고 관제탑은 생각했을 것입니다.하지만 이어 4분 뒤인 3시 28분에도 착륙에 실패했고 10분 뒤인 3시 38분 착륙도 실패로 끝납니다.그리고 3시 41분. 3차 착륙 시도 후 3분이 지난 시점에서 733대는 광주공항 관제 레이더에서 사라져 통신이 두절됩니다.충돌 직전 733대와 교신하던 광주공항 관제탑은 업데이트된 기상정보를 통보하려고 교신을 시도했지만 733대는 응답이 없었습니다.레이더에서 사라진 지 9분이 지난 3시 50분.733대는 목포공항에서 10KM가량 떨어진 해남군의 한 야산에 추락한 채 발견됐습니다.
참사

당시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은 116명. 이날 사고로 68명이 사망했습니다.당시 악천후로 인해 시야가 제한된 목포공항은 733대의 추락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고 승객 2명이 기내에서 빠져나간 뒤 산 아래 마산리 마을까지 내려와 인근 파출소에 가서 신고해 사고 사실이 알려졌습니다.목포소방서 해남소방파출소의 소방차 및 구급차가 출동하였고 목포소방서 119구조대도 출동하여 구조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신고자는 비행기 탑승객이었어요.비행기 탑승객이 다쳤음에도 마을까지 내려 파출소에 신고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경찰과 소방관 간의 통합 시스템이 없어 일일이 전화를 돌려가며 요청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당시에도 파출소가 처음 신고를 받았고 파출소는 해남경찰서로 해남경찰서는 목포소방서로 목포소방서는 해남소방파출소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시간이 많이 지연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속으로 추락하는 바람에 119구급차가 접근하지 못해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헬기가 긴급 투입해 부상자를 수송했는데, 문제는 이 알엣ll 대잠헬기가 경헬기여서 기내에 들것을 놓을 곳이 없어 부상자를 선 채로 와이어 매달아 수송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척추를 다친 부상자가 하반신 마비 등 2차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고 원인은 공항 시설의 부족, 조종사의 무리한 착륙 시도가 꼽혔습니다.특히 목포공항은 소규모 공항이었기 때문에 계기착륙장치가 존재하지 않았고 활주로도 1500m로 민항 여객기가 취항하기에 빠듯한 길이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악천후로 시야까지 제한되자 조종사들은 잇따른 접근 실패에 초조해 서둘러 착륙을 시도했지만 당시 착륙 허가를 받지 않고 착륙 절차를 밟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거듭된 착륙 실패에 조종사들은 다소 낮은 고도에서 접근을 시도했는데, 이때 비행기는 운이산을 만나게 됩니다.운거산의 높이는 827피트(252.1m). 원래 이 산 상공에서는 1600피트(487.7m)를 유지해야 했지만 블랙박스에 따르면 당시 비행기의 고도는 730피트(225.2m)까지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충돌 4초 전 봉우리를 발견한 조종사는 급히 비행기를 상승시켜 762피트(232.3m)까지 상승시켰지만 봉우리를 넘지 못했습니다.
당시 아시아나는 정시이착륙 세계 1위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때였는데, 이 때문에 조종사들이 이 기록 유지를 위해 무리한 착륙을 시도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행기 착륙을 그토록 방해한 비가 사고 발생 후에는 추가 희생자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추락 후 737대에서는 항공유가 누출됐지만 비 덕분에 2차 폭발이나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는 조종사는 공군 예비역 소령 황인기 씨와 예비역 중령 부기장 박태환 씨.황인기 기장의 경우 여객기 운행 시간만 3022시간을 조종했지만 고난이도 기술이 필요한 목포 노선 운행은 불과 2차례 한 것으로 밝혀졌고 박태환 부기장의 경우 공군 조종 시간은 3000시간을 넘지만 민간 여객기는 불과 24시간 조종하던 초보 조종사였습니다. 그도 목포 노선을 두 번 운행한 게 전부였어요.목포공항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1500m의 활주로를 두고 있기 때문에 민항 여객기가 취항하기 어려운 활주로였습니다.이런 공항에 다소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 2명을 배치한 것입니다.만약 목포공항에 경험을 쌓은 조종사를 한 명이라도 배치했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도 많은 공분을 사고 있었습니다.롱원피스를 입은 여성 부상자를 와이어로 매다는 과정에서 여성의 속옷 상하의가 노출된 장면이 찍혔는데, 기자들은 이 장면을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보도했습니다.MBC, KBS, SBS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와 같은 메이저급 신문사도 해당 장면을 기재했습니다. TV 뉴스에서는 자극적인 해당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 27일 지상파 3사 모두 방송위원회의 경고를 받고 사과방송을 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KBS 9시 뉴스에서는 해당 여성의 이름과 주소를 여과 없이 방송했고, 사고 당일 뉴스데스크에서는 부상 충격으로 온몸을 떨고 있던 어린 아이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저지른 기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언론의 추태와는 달리 관할 소방서인 목포소방서와 해남소방파출소는 인명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당시 현장 인근에 있던 마천마을 주민들 역시 생존자 구조에 전력을 다했습니다.마을 주민들 150여 명은 구조를 위해 직접 산에 가서 산길을 만들고 들것을 만들어 44명을 구조했고, 마을에 남은 주민들은 집에 있는 쌀과 밥솥 등을 임시구조본부가 설치된 국민학교에 보내 1000여 명의 구조대원들에게 봉사했습니다.

주민들은 이날의 충격적인 경험에 이후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세례 의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목포공항은 이 사고로 인해 여러 문제점이 수면 위로 올라갔고, 이를 대체할 공항의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결국 이후 무안국제공항이 건설되면서 목포공항은 현재 폐항되어 군 전용 비행장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고 발생 두 달이 지난 9월 26일. 아시아나항공 측은 보상비로 1인당 1억7500만원을 지급하기로 유족들과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회사는 과징금 4500만원을 내야 하고 서울-목포 운행을 3개월간 금지당했습니다.
1993년 대참사가 세 번이나 일어난 한 해였습니다.
청주에서는 우암상가 아파트가 무너지고 부산에서는 무궁화호 전복되는 참사가 발생했고 목포에서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그 해 더 이상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를 사람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733편 추락 참사가 발생한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서해 페리호 참사 위도를 오가던 배는 그해 가장 많은 인명사고를 내게 됩니다.
부산 구포 무궁화호 참사1993년 3월 28일.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2동 경부선 하행선 구포역 인근. 서울발 부산행 제117호 무궁화 blog.naver.com 서해페리호 참사부안과 격포 사이를 하루 1회 정기 운항하던 서해페리호. 1990년 10월 건조된 군산 서해페리 소속 여객선…blo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