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세종대왕 ‘우르그벡’ 천문대 [7박 9일, 우즈베키스탄 여행 4일차]

180921-1809297박9일 우즈베키스탄 여행 기티무르 제국의 유산 우루그벡 천문대

사마르칸트 방문지 [우르그벡 천문대/아플라시아프 박물관/하즈라히즈르/시아브바자르/비비하눔모스크/레기스탄/그루에미르]

우루그벡 천문대

아프라시아브 박물관에서 우루그벡 천문대로 걸어가면 강이 하나 보인다.아프라시아브의 이름이 유래된 ‘시아브 강’이다.강을 바탕으로 흙벽과 푸른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Toshkentyo’li, Samarqand,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아프 박물관에서 3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우루그벡 천문대(Ulugh Beg Observatory).입장료는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2만 2천 스무이었다.구르에미르 입장료도 2만2천 스무, 레기스탄 입장료는 2만1천 스무으로 비슷한 수준이다.울그벡(Ulugh Beg/Ulugbek)과 세종

울그벡 입구에 있는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르자 울그벡(Mirzo Ulugh Beg/Ulugbek)은 티무르 제국(1370~1507)의 창시자 티무르(Timur)의 손자이자 제국의 4대 군주이다.그러나 제왕으로서의 능력보다는 학자로서의 재능이 더 뛰어났으며 과학기술과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다고 한다.

일부 한국인은 을구벡을 조선의 세종에 비유하기도 한다.뜻밖에도 두 인물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1. 한 왕조의 4대 군주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국가를 열고 정치적 혼란을 3대 태종이 다스린 뒤 안정된 시기에 4대 세종이 등장했다.티무르 왕조 또한 1대 티무르가 시작되면서 그의 사후에 벌어진 혼란을 3대 샤르프가 끝내 안정시켰고, 이후 우루그벡이 4대 군주로 즉위했다.초대 군주는 국가의 기틀을 닦았다면 2~3대에 걸쳐 기강을 바로잡고 4대째 문화를 꽃피운 군주가 나타났을까.
  2. 2.15세기 활동 울그벡의 생몰년은 13941449년, 세종대왕은 13971450년 14세기 말에 태어나 15세기 중반까지 비슷한 시기에 살았다.우루그벡이 티무르 제국 전체의 지배자로 존재한 기간은 불과 2년여에 불과했지만 16세부터 사마르칸트의 총독으로 활동했으니 그의 활동 기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3. 3) 문화발전의 세종 업적은 써도 손이 아프니 감히 언급하지 않겠다.우루그벡은 천문대를 세워 세종처럼 매일 천문을 관측하게 하고 관측한 것을 토대로 별자리를 재정비했다.또 현재 사마르칸트의 랜드마크인 레기스탄에 최초의 마드라사(학문기관)인 ‘우르그벡 마드라사’를 세워 이슬람 세계의 학자들을 초빙하고 연구하도록 지원했다.그는 티무르의 르네상스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 4. 왕자 출신 학자 세종은 특히 언어 분야에 특출한 업적의 한글을 남긴 언어학자라면 울그벡은 천문학자로 이름을 남겼다.우루그벡은 마드라사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5. 이상하게도 을구벡과 세종대왕은 전혀 다른 곳에 살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이런 점을 알고 보니 더 흥미로웠다.우루그벡 천문대

(왼쪽) 울그벡 전시관 / 울그벡 천문대 1420년대에 세워졌다는 울그벡 천문대는 원형의 절반만 남아있었다.천문대와 마주보고 세워진 전시관까지 보더라도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작은 곳이었지만 세종대왕과 비교해 볼 때 흥미로웠다.

상부는 사라지고 하부만 남은 천문대원래는 아래에서 관측하는 것인데 우리는 위에서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중앙에 층계와 같은 층계가 있었는데, 그 층계를 따라 선로처럼 뻗은 길에는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마침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 사람과 한국인이 들어와서 천문대에 관한 이야기를 한국어로 해서 잠깐 들어봤다.우즈베키스탄인이 설명해 준 우르그벡 천문대의 원리는 우물에서 하늘을 보는 것이었다.우물 안에서는 주위가 어두워 낮에도 별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천문대도 내부를 어둡게 해 창문을 두고 밤낮으로 언제든지 창을 통해 천문을 관측할 수 있는 원리를 사용했다고 한다.밤에도 가로등이 켜져 밝은 곳에서는 별이 보이지 않지만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빛을 가려보면 더 잘 보이는 것도 같은 원리일 것이다.우루그벡 전시관

천문대와 마주보고 있는 건물은 마치 마드라사(Madrasa/메드레세 Medrese)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우루그벡과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던 곳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대통령 카리모프가 우루그벡에 대해 쓴 찬사가 입구에 적혀 있었다.우루그벡의 초상 중에는 지구본 같은 것도 함께 있다.군주였으나 과학과 예술탐구에 몰두한 학자인 그를 잘 나타내었다.실제로 그는 통치자의 자질은 별로 없었던지 티무르 제국 전체의 지배자가 된 2년 뒤 아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티무르 왕조 자체가 몽골제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몽골풍의 초상화도 남아 있었다.티무르는 몽골제국의 차가타이칸국을 이룬 부족 출신으로 칭기즈칸의 후손(‘비비하눔 모스크’의 전설을 남긴 비비하눔 왕비)과 결혼하여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티무르는 칭기즈칸의 직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왕이나 칸이라 부르지 않았다.대신 장군을 뜻하는 ‘아미르(Amir)’란 칭호를 사용했다.

내부에는 울그벡 시대의 궁전과 코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 울그벡 천문대의 원형을 상상해 만든 모형도 꽤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콜로세움처럼 둥근 건물 위에는 아마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천문 관측 장치가 놓여 있는 형태를 어디선가 자주 본 것 같다.

건물 중간쯤에 붉은 원으로 표시된 지점이 지금의 입구라고 한다.그 윗부분은 소실되지 않았다.

계단처럼 된 부분이 각도를 나타내며 빛이 들어온 위치를 통해 태양의 고도 등을 파악하는 원리와 같다.창문으로 들어온 빛으로 눈금을 읽는 학자는 아마 울그벡 자신일 것이다.당대의 유명한 천문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루그벡이 얼마나 유명한 천문학자였는지는 이 그림에서도 알 수 있다.이 그림은 울그백보다 200년 앞선 폴란드 천문학자 요하네스 헤벨리우스(Johannes Hevelius)의 책에 삽화돼 있는 장면이다.

하늘을 표현한 우라니아(URANIA)를 중앙에 두고 세계의 저명한 천문학자들이 모여 있는데, 우라니아의 오른쪽에는 고대 최고의 천문학자로 일컬어지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왼쪽에는 우르그벡이 표현되어 있다.

당대에 사용했던 지구본이나 시계로 보이는 기구 등 천문지리에 관련된 물건도 있었다.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았던 기구와 무척 닮아 신기했다.사마르칸드의 지리적 위치

카라반들이 여러 곳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가져와 이곳에서 공유하다 보니 몰랐던 부분을 다른 지역의 지식으로 보충하면서 더 많은 새로운 지식이 탄생했다.전시실에서도 영어권 안내원에게 귀를 기울였다.사마르칸드 지역에서 과학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는 카라반들에게 찾았다.그 밖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교류와 공유는 분명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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